조세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아마도 개인적으로 이 책은 3번 이상 읽게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마도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아니면 고등학교 이전에 한번쯤 읽었던 것 같고, 군대를 다녀온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도 한번 읽어보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 다시 한번 더 읽어 보게 되었다. 자의에 의해서 이 책을 다시 읽어보게 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번 학기에 김원중 교수님의 생태 문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으니, 많은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꼭 외국 서적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문학 작품도 섞어서 강의를 하니, 책을 읽는 폭이 더 넓어지니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은 이미, 워낙 유명한 책이다보니 딱히 설명을 할 것도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 1970년대 산업화, 공업화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노동자와 자본가 계층의 대립적인 삶의 모습을 너무나도 신랄하게 그려내고 있는 문학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난장이 집의 가족이 허물어 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조세희 작가는 그런 것을 경험을 해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집이 허물리는 것을 경험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구점에 들러서 원고지를 사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책이라고 한다. 실제로 작가가 책을 쓸 때, 우리나라 70년대 산업화의 부정적인 모습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집안 벽 곳곳에 붙여놓고 글을 썼다고 하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실제와 같이 담아내려고 했던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작가는 故 정주영 회장을 찾아가서 면담을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많은 좌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에 일어났던 용산 참사의 현장에도 조세희 작가는 가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 책은 가볍게 쓰여진 책이 아니다보니,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책인 것 같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렇게나 글을 쓰는 것보다는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해준 이야기를 토대로 글을 정리하고 마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서는 대조의 수법을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장이가 살고 있는 작품 속의 세계는 둘로 나누어진 세계, 대립되는 세계, 모든 것들이 둘로 나누어진 세계인 것 같습니다. 한쪽 세계는 욕망, 그 세계는 자본으로 상징되는 세계, 그리고 그 자본은 기계로 이어지는 세계... 반대 쪽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착취 당하는 노동자가 있는 세계... 그런 세계에서 인간은 철저히 비인간화되고 근육 운동만 필요한 존재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난장이로 묘사됨과 동시에 동물로 묘사가 됩니다. 하지만, 그 곳에는 사랑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는 노동, 희생, 가난과 같은 것들로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세희 작가는 일상적인 것들로 이러한 세계를 도저히 그려낼 수가 없었는지, 동화적인 이분법을 사용해서 이러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세계에서는, 한 마디로 "사랑이 없는 욕망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다."라고 작가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욕망의 반대는 "사랑이 있는 욕망"도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열반"을 뜻하는 말은 불이 꺼지다라는 뜻입니다. 심장의 엔진이 꺼지는 순간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기에, 결국 모든 살아있는 인간은 욕망을 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욕망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욕망 속에서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핵심일 것입니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라는 부분에서,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강요된 것은 사랑이었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사랑이 없는 땅은, 인간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고통을 받는 세계일 것 입니다.

교회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교회 조차도 위선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종교라고 하는 것이 과연 인간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라는 의문, 결국 신도 공범자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것일 것입니다.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사랑"이라는 좋은 말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작가의 위선같은 의식이 드러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현실이 빼앗아가버린 한 차원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작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합니다. 3차원에 사는 사람들과 2차원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 클라인씨의 병 같은 것들이 차원의 이야기와 연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안과 밖이라는 경계의 허물기는 처음부터 불가능 한 것이 아닌가라고 전제를 하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의 구분이 없지만, 실제로 뫼비우스의 띠 한면만을 따라가면 한쪽 면만 맴돌지, 절대로 안쪽을 맴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많은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해주셨지만, 전부 블로그에 기록하기는 쉽지가 않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교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남기셨다.

우리는 누구인가? 난장이인가? 거인인가?


소인배

Since 2008 e-mail : theuranus@tistory.com

    이미지 맵

    도서관/서평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