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리 케이건(Shelly Kagan)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
한 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가진 마이클 센델 교수의 책이 우리나라에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온 적이 있다. 소인 역시 그 책을 읽었고, 포스팅까지 한 적이 있기도 하다. 이번에 읽은 책 셸리 케이건 예일대 교수의 "죽음"에 관한 책도 아이비리그 3대 명강의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꼽힌 "죽음"에 관한 강의, 책을 통해서 한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해서 한번 숙고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러한 부분은 책을 읽기 전에 제목만 보더라도 충분히 유추를 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철학적인 개념을 사용하면서 심오하게 다루는 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읽으면서 어렵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그만큼 철학적인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설명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초반부에는 우선 질문을 던진다. "과연 죽은 다음에도 나는 존재 하는가?", "사후에도 삶이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해서 먼저 살펴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인간에 대한 설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 두 번째는 물질주의로 인간은 육체 그 자체이고 정신은 다양한 육체적 기능에 속하지 않는다는 개념이다. 두 가지의 큰 개념 중, 어느 것이 더 그럴 듯한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숙고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이러한 애매모모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이라는 기법이다. 다른 방식이 아닌 오직 특정한 방식으로만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때, 추론의 과정으로 그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을 가지고, 우선 영혼의 존재가 있다는 이원론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과연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여야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 있는가"를 찾아내는 과정을 거치는데, 셸리 케이건 교수의 주장은 단호하다. 영혼은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물질주의 주장 역시 완전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언급을 한다. 결론은 이원론과 물질주의 "무승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완전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직까지는 시기상조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데카르트"의 주장 "육체 없이도 정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내 마음과 몸은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파이돈>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설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반론을 들어가며 영혼은 없다라는 결론에 가까워지고 있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상당히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계속해서 죽음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육체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과 인격적인 관점을 가지는 두 관점의 사이에서, 죽음의 시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관점의 경우, 죽음은 B(Body)의 기능이 중단되는 시점을 죽음이라고 보는 반면, 인격적인 관점에서는 B기능의 종료시점이 아니라, 생각하고, 사랑하고, 대화하고, 자의식을 가지는 P 기능의 종료 시점이 죽음이라고 보는 것이다.
죽음이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라는 자신이 존재할 때,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될 수 있다. 하지만, 죽고 나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될 수가 없다는 것이 설명이다. 죽음이 나쁜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만 나쁠 뿐이다. 하지만, 존재가 사라지는 것, 즉 비존재가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상대적인 기회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주장을 "박탈이론"이라고 이름을 붙이는데, 살아있으면 얻을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박탈해버리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언제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도 책에서 숙고를 해보고 있다.
죽음이 언제 나쁜지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에피쿠로스"의 글 속에서 이러한 내용을 찾을 수 있는데, "오로지 존재할 때만 나쁜 것이 될 수 있다"는 처음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름 주장, "루크데타우스"의 경우, 내가 없던 과거, 그리고 앞으로 내가 없을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을 한 학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없을 미래가 나쁜 것이라면, 내가 없었던 과거 역시도 나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한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루크데타우스가 직접 주장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을 박탈 이론과 연결시켜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용어가 등장한다. "쉬모스(Schmoss)"라는 개념인데, 이 책에서는 이 단어를 '아직 갖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갖게될 상태'로 정의를 하고, 이것을 상실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이야기를 계속해서 펼쳐 나가는 부분이다. 철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지만, 결국 셸리 케이건도 "박탈이론"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인다. 살아있으면 얻을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박탈해버리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영생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과연, 영생은 좋은 것일지 나쁜 것일지에 대해서 말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조나단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서 영생하는 마을이 등장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소설을 예전에 읽어보아서 이러한 부분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는 영생을 아주 좋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놓았다는 것이다. 몸은 계속해서 늙어가는데, 삶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정말로 무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았다면, 그것을 토대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에 관해서 생각을 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과감하게 등장하는 것이 "쾌락주의"이다. 쾌락과 고통이 본질적인 선악의 유일한 사례라고 가정하면, 쾌락은 본질적으로 좋은 '유일한' 요소로, 고통은 본질적으로 나쁜 '유일한' 요소라고 보는 관점을 말한다.
그릇과 같은 삶, "그릇 이론". 그릇이론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중립적 그릇이론의 경우, 삶의 가치를 0이라고 보고, 삶의 내용물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수치는 좋은 것의 총합이 많으면 +로 나올 것이고, 나쁜 것의 총합이 많으면 -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쾌락주의는 이러한 중립적 그릇이론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가치적 그릇 이론으로 삶 자체가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내용물 외에 추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또, 온건버전과 환성적 버전으로 나뉘는데, 온건보전의 가치즉 그릇 이론의 경우 -로도 총합이 나타날 수 있지만, 환상적 가치적 그릇 이론의 경우는 말 그대로 무조건 +밖에 나올 수 밖에 없는 이론을 말한다.
죽음의 필연성, 가변성, 예측불가능성, 삶과 죽음의 상호효과라는 소제목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죽음이 가진 속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한번 다루어 보는 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태까지 살펴본 죽음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크게 세가지의 반응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부정하는 것, 또다른 하나는 인정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무시하는 것,
하지만, 죽음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은 적절한 태도라고 할 수 없으므로, 죽음을 인정하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시간은 매우 짧고 귀하기 때문에 실수를 줄이는 삶의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가치 있는 일들이 있지만, 그것을 다 하기에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은 쉽게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요구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셸리 케이건 교수는 자살에 관해서 단순히 나쁘다라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합리성과 도덕성을 기준으로 자살에 관해서 요목조목 따져보는 것이다. 우선 합리성을 기준으로 따져볼 때자살은 때로는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다음 항목인 도덕성을 기준으로 요목조목 따져보고 비판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근거는 주로 "결과"를 위주로 다룬다.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결과만을 놓고 보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실현이 되면 그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의무론"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결과 뿐만이 아니라 과정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룰 주지 않아야 한다는 한가지 조건이 더 붙는다. 여기에, "온건적 동의 이론", 특정한 상황에서 무고한 사람의 동의가 있을 때에는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것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자살은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자살은 나쁘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요목조목 따져가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하지만 분명 셸리 케이건 교수의 진심은 죽음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보았으니, 이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있게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에 대한 생각...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충만한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듯 한 책이다. 책의 에필로그 부분에 있었던 글귀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 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가진 마이클 센델 교수의 책이 우리나라에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온 적이 있다. 소인 역시 그 책을 읽었고, 포스팅까지 한 적이 있기도 하다. 이번에 읽은 책 셸리 케이건 예일대 교수의 "죽음"에 관한 책도 아이비리그 3대 명강의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꼽힌 "죽음"에 관한 강의, 책을 통해서 한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책의 초반부에는 우선 질문을 던진다. "과연 죽은 다음에도 나는 존재 하는가?", "사후에도 삶이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해서 먼저 살펴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영혼은 과연 존재하는가?
인간에 대한 설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 두 번째는 물질주의로 인간은 육체 그 자체이고 정신은 다양한 육체적 기능에 속하지 않는다는 개념이다. 두 가지의 큰 개념 중, 어느 것이 더 그럴 듯한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숙고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이러한 애매모모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이라는 기법이다. 다른 방식이 아닌 오직 특정한 방식으로만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때, 추론의 과정으로 그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을 가지고, 우선 영혼의 존재가 있다는 이원론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과연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여야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 있는가"를 찾아내는 과정을 거치는데, 셸리 케이건 교수의 주장은 단호하다. 영혼은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물질주의 주장 역시 완전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언급을 한다. 결론은 이원론과 물질주의 "무승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완전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직까지는 시기상조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데카르트"의 주장 "육체 없이도 정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내 마음과 몸은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파이돈>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설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반론을 들어가며 영혼은 없다라는 결론에 가까워지고 있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상당히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죽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계속해서 죽음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육체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과 인격적인 관점을 가지는 두 관점의 사이에서, 죽음의 시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관점의 경우, 죽음은 B(Body)의 기능이 중단되는 시점을 죽음이라고 보는 반면, 인격적인 관점에서는 B기능의 종료시점이 아니라, 생각하고, 사랑하고, 대화하고, 자의식을 가지는 P 기능의 종료 시점이 죽음이라고 보는 것이다.
죽음은 왜 나쁜가?
죽음이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라는 자신이 존재할 때,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될 수 있다. 하지만, 죽고 나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될 수가 없다는 것이 설명이다. 죽음이 나쁜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만 나쁠 뿐이다. 하지만, 존재가 사라지는 것, 즉 비존재가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상대적인 기회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주장을 "박탈이론"이라고 이름을 붙이는데, 살아있으면 얻을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박탈해버리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언제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도 책에서 숙고를 해보고 있다.
죽음이 언제 나쁜지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에피쿠로스"의 글 속에서 이러한 내용을 찾을 수 있는데, "오로지 존재할 때만 나쁜 것이 될 수 있다"는 처음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름 주장, "루크데타우스"의 경우, 내가 없던 과거, 그리고 앞으로 내가 없을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을 한 학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없을 미래가 나쁜 것이라면, 내가 없었던 과거 역시도 나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한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루크데타우스가 직접 주장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을 박탈 이론과 연결시켜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용어가 등장한다. "쉬모스(Schmoss)"라는 개념인데, 이 책에서는 이 단어를 '아직 갖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갖게될 상태'로 정의를 하고, 이것을 상실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이야기를 계속해서 펼쳐 나가는 부분이다. 철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지만, 결국 셸리 케이건도 "박탈이론"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인다. 살아있으면 얻을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박탈해버리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영생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과연, 영생은 좋은 것일지 나쁜 것일지에 대해서 말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조나단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서 영생하는 마을이 등장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소설을 예전에 읽어보아서 이러한 부분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는 영생을 아주 좋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놓았다는 것이다. 몸은 계속해서 늙어가는데, 삶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정말로 무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죽음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았다면, 그것을 토대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에 관해서 생각을 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과감하게 등장하는 것이 "쾌락주의"이다. 쾌락과 고통이 본질적인 선악의 유일한 사례라고 가정하면, 쾌락은 본질적으로 좋은 '유일한' 요소로, 고통은 본질적으로 나쁜 '유일한' 요소라고 보는 관점을 말한다.
그릇과 같은 삶, "그릇 이론". 그릇이론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중립적 그릇이론의 경우, 삶의 가치를 0이라고 보고, 삶의 내용물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수치는 좋은 것의 총합이 많으면 +로 나올 것이고, 나쁜 것의 총합이 많으면 -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쾌락주의는 이러한 중립적 그릇이론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가치적 그릇 이론으로 삶 자체가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내용물 외에 추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또, 온건버전과 환성적 버전으로 나뉘는데, 온건보전의 가치즉 그릇 이론의 경우 -로도 총합이 나타날 수 있지만, 환상적 가치적 그릇 이론의 경우는 말 그대로 무조건 +밖에 나올 수 밖에 없는 이론을 말한다.
죽음을 마주하고 산 다는 것...
죽음의 필연성, 가변성, 예측불가능성, 삶과 죽음의 상호효과라는 소제목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죽음이 가진 속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한번 다루어 보는 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태도
여태까지 살펴본 죽음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크게 세가지의 반응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부정하는 것, 또다른 하나는 인정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무시하는 것,
하지만, 죽음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은 적절한 태도라고 할 수 없으므로, 죽음을 인정하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시간은 매우 짧고 귀하기 때문에 실수를 줄이는 삶의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가치 있는 일들이 있지만, 그것을 다 하기에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은 쉽게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요구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자살에 관하여...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셸리 케이건 교수는 자살에 관해서 단순히 나쁘다라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합리성과 도덕성을 기준으로 자살에 관해서 요목조목 따져보는 것이다. 우선 합리성을 기준으로 따져볼 때자살은 때로는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다음 항목인 도덕성을 기준으로 요목조목 따져보고 비판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근거는 주로 "결과"를 위주로 다룬다.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결과만을 놓고 보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실현이 되면 그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의무론"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결과 뿐만이 아니라 과정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룰 주지 않아야 한다는 한가지 조건이 더 붙는다. 여기에, "온건적 동의 이론", 특정한 상황에서 무고한 사람의 동의가 있을 때에는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것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자살은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셸리 케이건 교수의 진심은 죽음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보았으니, 이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있게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에 대한 생각...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충만한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듯 한 책이다. 책의 에필로그 부분에 있었던 글귀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죽음은 너무 빨리 오지만
삶의 기회를 받은 것은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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