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향 '에메랄드 궁' "제9회 세계문학상 대상작"

박향 '에메랄드 궁' "제9회 세계문학상 대상작"


박향 '에메랄드 궁' "제9회 세계문학상 대상작"

겨울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봄, 여름 내내 열심히 피워왔던 잎을, 스스로 떨어뜨려야 한다.
겨울을 보내기 위해서, 삶을 연장하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 몸의 일부를 살아남기 위해서 떼어내야 한다는 것, 슬픈 일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곳에서 살아가기 위한 숙명이 아니겠는가, 그 파릇파릇한 잎을 떼어내는 나무의 마음은 어떨까...




에메랄드 궁이라는 소설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자연 속의 식물도 감정이 있다면, 제 몸의 일부를 떼어 낸다는 것이 슬플진데, 사람의 마음은 오죽할까 싶다.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몸에서 나온 자식을 버려야 하는 부모의 심정이란... 나는 다행히 아직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해서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지만, 책을 읽으면서 저런 상황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앞길이 막막한 상황일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왔다.

한(恨)이 맺힌 인물들, 사회의 음지인 모텔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그들의 이야기...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하나같이 한(恨)이 맺힌 인물들이다. 모텔이라는 사회의 음지에서 벌어지는 일들, 에메랄드라는 이름을 가진 모텔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간다.

한 때, 사랑만으로 유부남 "상만"과 도망쳐, 가족과 자식, 젊음, 사랑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채, 모텔 카운터를 지키는 "연희"라는 인물, 갑작스럽게 갓난 아이와 함께 모텔에서 장기 투숙을 하게 된 젊은 연인 "경석"과 "혜미", 반 정신이 나간 채로 몸을 파는 "선정", 벙어리 투숙객 "수호", 자식들의 반대를 피해서 뒤늦은 사랑을 꽃피워보기 위해 모텔로 찾아든 황혼커플, 그리고 모텔 주위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는 "정란", 그리고 그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

더 이상의 희망이 없어보이는 비관적인 상황, 우리들의 모습일까?
그들의 모습에서 위안을 얻어야 하는 상황일까?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하나 같이 드라마 속에서나 등장할 만한 한(恨)이 맺힌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다. 한 때는, 에메랄드 모텔 꼭대기의 황금돔이 그들을 부유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은 점점 더 보이지 않는 안타까운 상황이 펼쳐질 따름이다.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버텨보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관적인 현실 뿐이다.

사회 속의 음지,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희망이 없어보이는 모텔,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인, 낙태, 도망, 불륜 등으로 점철되는 그들의 삶을 하나 하나 우리들에게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항상 있어왔지만, 우리가 여태까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음지에서 소외 받으며 힘들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생존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을 배신하고 도망가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러면서도 가슴에는 한을 간직한 채 어쩔 수 없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들의 모습을...

이러한 모습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연희"의 대사에서 드러나기도 하는 듯 하다.

겁이 난다. 망하는 게 겁나는 것이 아니다. 아무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무너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무섭다. 속수무책인 시간이 지나면 마치 자신의 인생이 통째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사회의 음지로 생각되는 모텔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축복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부분이다. 온전한 가정을 한번 이루어 보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새삼 우리 부모님들의 노고가 얼마나 심했을지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도 했다.



왜 317호일까?

소설 속의 317호는 좋지 않은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이다.
상만의 전 부인이 찾아와서 상만과 사흘간 함께 머무르는 공간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의 전 부인이 자살을 기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후, 벙어리인 "수호" 역시 그의 연인과 좋은 시간을 보애는 장소이기도 하고, 후에, 그가 자살을 기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다른 공간도 많이 있을 텐데, 왜 하필 317호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하는 부분이다.

작가는 어떻게 "모텔"이라는 장소를 배경으로 있음직한 일을, 그리고 그것을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을까?

사실, 책 제목만 보고서는 이야기의 배경이 모텔일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작품을 읽는 내내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렇게 "모텔"이라는 배경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그곳을 찾을 것 같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잘 그려낼 수 있었을지... 그런 부분에서 감탄이 일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이다. 그만큼, 작가가 그 곳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일은 어렵다. 글을 잘 쓰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한 시대를 반영하는, 현실에서 일어남 직한 일을 그럴 듯 하게 꾸며서 쓰는 것, 그리고 현실에 있음 직한 캐릭터를 만들어 내서 이야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만들어 내는 것,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모두를 자연스럽게 해냈다는 점, 그 부분에서 이 작품이 세계문학상 대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작품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소인배

Since 2008 e-mail : theuranu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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