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하디(Thomas Hardy) '아내를 위하여(To please his wife)'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아내를 위하여(To please his wife)'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아내를 위하여(To please his wife)'

한 때, 대한민국에도 아내의 유혹과 같은 속칭, 막장 드라마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 드라마를 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워낙 인기가 많았던 탓에 여기저기서 들리는 이야기를 조금씩 접했던 것 같기는 하다. 드라마를 보지 않았던 사람 조차도 그 드라마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니... 사람들은, 의외로 일명 "막장 스토리"를 바라고 있다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토마스 하디의 작품, "아내를 위하여"라는 짤막한 소설은 현대 드라마에서 보이는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주인공의 신분 상승에 대한 욕심, 돈에 대한 욕심, 그리고 시기와 질투를 벌인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주인공인 조안나와 졸리프의 결혼생활에서도 여성인 조안나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욕망에 사로잡힌 한 여인의 질투심이 불러온 삼각관계...

항해를 마치고 살아서 돌아온 졸리프(Sadrach Joliffe)가 교회로 가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졸리프는 거리에서 에밀리(Emily Hanning), 조안나(Joanna Phippard)를 만나고 곧 에밀리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졸리프는 조안나와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되고, 둘은 결혼 약속을 하게 된다. 둘의 약혼에 에밀리가 크게 상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안나는 졸리프와 파혼을 하려고 하지만, 에밀리를 만나러 간 조안나는 에밀리와 졸리프가 사랑을 확인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질투에 사로잡힌 조안나는 졸리프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에밀리는 레스터라는 부자의 청혼을 받고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에밀리는 점점 더 부유해지게 되고, 조안나는 점점 더 가난해지게 된다. 부자가 된 에밀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조안나는 질투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러한 조안나에게 졸리프는 자신이 장사에는 소질이 없으니 바다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겠다고 한다. 아내의 승낙을 받아낸 졸리프는 첫 번째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꽤 많은 돈을 조안나에게 벌어오게 된다. 하지만, 조안나는 에밀리의 "부"와 비교하며, 졸리프가 벌어온 돈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졸리프는 다시 항해를 나가게 되는데, 이 때, 조안나에게 조건을 걸게 된다.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항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민에 빠진 조안나는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지만, 결국 그들을 바다로 내몬다. 결국, 졸리프와 두 아들은 바다로 떠난다.

혼자 남겨진 조안나는 점점 더 생계 유지가 어렵게 되고, 예정된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졸리프와 두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조안나의 모습이 안쓰러운 에밀리는 조안나에게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자고 하고, 조안나의 집에서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결국, 가족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조안나는 점점 더 피폐해진 모습을 보이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욕망, 그 가벼움에 대하여...

작품을 읽는 내내, 이야기의 중심에 등장한 3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사람이 한번 타인과 비교를 하게 되면, 죽을 때까지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스스로 파멸할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주는 씁쓸한 이야기 중의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만큼,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뒷받침 뿐만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토마스 하디가 살았던 빅토리안 시대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나보다는 생각이 든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룩했던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 물질적인 풍요와는 달리, 위선과 허영이 판을 치고 있었나보다 하는 생각이다. 그러한 세태를 풍자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드는 부분이다.



"나는 비판주의자이나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by Thomas Hardy

토마스 하디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비판주의자이나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상당히 애매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사회개혁에 힘을 쓰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를 개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가 사회의 잘못된 행태를 비판하는 작품을 쓰면서,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그는 한 때, 이렇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지구는 고등동물에게 행복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 같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은 "Novels of Character and Environment"이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은 "Novels of character and environment"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연주의" 작품과도 어울리는 부분인데, 자연주의는 "유전과 환경에 의해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결정론적인 시각"을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성격도 유전 중의 하나이고, 우연적으로 제시되는 환경 역시, 환경적인 요소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기 때문에, 자연주의 문학은 대부분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면서 끝이 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자연주의는 자연스럽게 단명하게 되기도 했다.

다시, 토마스 하디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토마스 하디는 인간에 내재한 성격, 환경 모두가 "내재적 힘(Immortal Will)"의 결과라고 보았다. 우주의 에너지는 "내재의지(Immortal Will)"이라는 것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는데, 마치 신과 같은 존재이지만, 인간의 비극에는 무관심한 신을 이야기 한다고 한다. 그래서, 토마스 하디의 소설은, "자연주의"와 매치가 잘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래도, 작품에서 인간의 의지적인 요소를 무시하고, 환경적인 요소를 더 강조하다보니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욕망이 인간은 잠식하게 되면, 그 결과는 끔찍할 수 있다는 것, 절대로 자신의 현재 상태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
욕망의 화신이 이 작품에서는 "조안나"로 나타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누구나 조안나가 될 수 있다는 것,
가치가 부재한 사람에게는 행복이 찾아오다가도 도망갈 수 있다는 것,
그러한 간단한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할 수 있는 작품 중의 하나였다.


소인배

Since 2008 e-mail : theuranus@tistory.com

    이미지 맵

    도서관/서평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