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카 유지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도서관에서 재미있는 제목을 가진 책을 발견했다. 보통 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하면, 한국역사 또는 일본역사 형식으로 따로따로 나누어서 다루는 것이 일반적인 듯 한데, 이 책은 독특하게도 조선을 대표하는 세력인 "선비"와 일본을 대표하는 한 축 "사무라이"를 동시에 다루었다는 점이 흥미를 끌었다.
아마, 양쪽 문화를 동시에 다 궤뚫고 있어야 이러한 책을 쓸 수 있을 것인데, 이러한 책을 출판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 속에 들어왔다.
책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대표주자 선비와, 일본의 사무라이에 대해서 비교하고 대조하는 형식으로 보여준다. 꼭 정확히 이러한 부분은 비슷하고 저러한 부분은 다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한번은 선비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한번은 사무라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선비란 어떠한 사람인가?"
우선, 선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선비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말을 한번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책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조선의 학자 "권근"은 선비에 대해서 말하길, "현달하면 벼슬에 나아가 도를 실천하고 벼슬을 못하면 농사에 힘쓰는 것이 선비의 떴떳함이다."라고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율곡 이이 역시, "동호문답"에서 선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반면, 사무라이는..."
상류 무사에서 출발했다고 하는데, 일본 최초의 무사는 "다이라노 마사카도"라는 헤이안 시대 중기의 무사라고 한다. 사무라이는 "무사도"라는 규율을 따르며, 이 규율은 "선비"가 따르는 규율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선비는 "붓"을 들고 싸운다고 한다면, 사무라이는 "칼"을 들고 싸우는 것, 그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부분이다.
"하지만! 16세기 말까지 "무사"의 일반적 사고방식은 주군과의 '계약관계'"
16세기, 임진왜란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무라이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주군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일본에 성리학에 전파되었고, 이로 인해서 일본 사람들이 성리학에 심취하며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교화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무사의 사고방식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무사"의 기본 가치관이 조선의 "선비"와 유사하게 변화한 것이라고 한다.
"효를 강조한 조선의 선비, 충을 강조한 일본의 사무라이"
또 하나, 둘의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조선의 선비는 "충"보다 "효"를 더 강조했음에 반해, 일본의 사무라이는 "효" 보다는 "충"을 더 강조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선비의 기원은... 고려시대 안향에 의해 성리학이 전래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실 이전부터 선비라는 존재는 있어왔겠지만, 본격적으로 선비라는 존재가 부각되던 시기는 아마, 고려시대, 안향이 중국으로부터 "성리학"을 들여오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성리학은 우주 만물의 근원을 이해하는 사상 중의 하나로, 일종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무사의 기원은..."
일본의 경우, 무사는 다양하게 생겨났다고 한다. 첫 번째는 바로 "농민"들이 자신들의 재산과 토지를 지키기 위해서 무장하면서 생긴 경우라고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헤이안 시대 후기(794~1191) 이러한 사무라이들이 많이 출현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도 농민 출신의 사무라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당시 일본의 도읍이었던 교토로 돌아가지 않고 임지에 남은 국사(지방관리)가 그대로 무사의 동량이 된 경우라고 한다. 국사로 임명되어 각 지방에 내려가 관리 생활을 한 사람을 수령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수령 중에는 교토에서 신분이 별로 높지 않은 중류 귀족이나 왕족도 있었다고 한다.
"이황과 성혼, 일본 학풍의 원류가 되다"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면,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의 선진 문물이 일본에 들여지게 되었는데, "성리학" 역시도 일본에 전파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바탕을 둔 성리학이 일본 성리학 학풍의 원류가 되었다는 것,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황의 저서가 일본의 약탈에 의해서 일본에 전달되고 일본 사람들이 그 책을 보고 감동을 받고 교화가 되는 계기가 되게 되었다니, 세상사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 통신사, 한류의 원조"
예전 국가 공부를 할 때, 조선 후기,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통신사는, 일본의 요청으로 간 적이 많았다고 배웠다. 단지, 조선의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하기 위해서, 일본과의 사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보냈다고 배웠는데, 이 책에서 조금 더 상세하게 나와있으니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조선에서 파견된 통신사는 마치, 지금의 한류스타와 같은 인기를 끌었다고 하니, 한류의 원조가 아니었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부분이기도 하다. 통신사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이 지은 "한시"를 보여주고, 교정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일본인이 있기도 하고, "한시"를 한 수 읊어 달라고 요청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고 하니... 당시 통신사의 인기가 어쩌면 지금의 한류보다 더 높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예전에 단편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공부할 때, 우리나라 역사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적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래도, 항상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은 잘 보이지 않고, 항상 수동적이고 당하는 입장이 그려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역시도 그렇다.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큰 전란을 겪으면서,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조금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인지, 조선 역사를 들춰볼 떄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 같다.
"성리학"에 대한 생각 역시도 서서히 바뀌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 역사를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성리학을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철학적인 것에만 선비들이 주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조선과 같은 나라에서 "성리학"이라는 철학이 꽃필 수 있었다는 것은 서양 철학과 비교해서도 크게 뒤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 때문이다.
비록, 두 차례의 전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금까지 잘 유지해올 수 있었다는 것 역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비록 우리나라는 항상 위에서 관리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들이 살려놓는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지만, 아마 이러한 것들이 유학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 궁궐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궁궐과는 다르게, 조선의 궁궐은 담이 상당히 낮다. 그만큼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넫, 백성들과의 거리를 두지 않았다는 것, 그만큼 왕도정치가 잘 이루어졌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책에서는, 조선 역사 못지 앟게 일본 역사도 상당히 많이 다루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일본 역사를 한번도 공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상당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부분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조선 역사와 함께 일본 역사를 조금이나마 접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어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오다 노부나가"와 같은 인물의 이름은 일본 역사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많이 들어본 이름이니, 한번 접해놓으면, 나중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 더 이해하기 편해지지 않을까 싶다.
일본 역사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독특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책,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를 비교한 책, 읽는데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던 한 권의 책이다.
도서관에서 재미있는 제목을 가진 책을 발견했다. 보통 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하면, 한국역사 또는 일본역사 형식으로 따로따로 나누어서 다루는 것이 일반적인 듯 한데, 이 책은 독특하게도 조선을 대표하는 세력인 "선비"와 일본을 대표하는 한 축 "사무라이"를 동시에 다루었다는 점이 흥미를 끌었다.
아마, 양쪽 문화를 동시에 다 궤뚫고 있어야 이러한 책을 쓸 수 있을 것인데, 이러한 책을 출판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 속에 들어왔다.
"조선을 대표하는 주자 선비, 그에 맞서는 일본의 사무라이"
책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대표주자 선비와, 일본의 사무라이에 대해서 비교하고 대조하는 형식으로 보여준다. 꼭 정확히 이러한 부분은 비슷하고 저러한 부분은 다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한번은 선비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한번은 사무라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선비란 어떠한 사람인가?"
우선, 선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선비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말을 한번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책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조선의 학자 "권근"은 선비에 대해서 말하길, "현달하면 벼슬에 나아가 도를 실천하고 벼슬을 못하면 농사에 힘쓰는 것이 선비의 떴떳함이다."라고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율곡 이이 역시, "동호문답"에서 선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선비는 산림에 묻혀서 자신의 몸만 꺠끗하게 함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벼슬을 하고 모든 사람들을 자신처럼 깨끗하게 만듦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이 벼슬로 나가고 싶지만 세상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때, 자신이 벼슬을 통해 이념구현을 할 수 없을 때, 또는 때를 만나지 못했을 때 부득이 산림에 묻혀 독선하는 것이다.
"반면, 사무라이는..."
상류 무사에서 출발했다고 하는데, 일본 최초의 무사는 "다이라노 마사카도"라는 헤이안 시대 중기의 무사라고 한다. 사무라이는 "무사도"라는 규율을 따르며, 이 규율은 "선비"가 따르는 규율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선비는 "붓"을 들고 싸운다고 한다면, 사무라이는 "칼"을 들고 싸우는 것, 그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부분이다.
"하지만! 16세기 말까지 "무사"의 일반적 사고방식은 주군과의 '계약관계'"
16세기, 임진왜란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무라이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주군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일본에 성리학에 전파되었고, 이로 인해서 일본 사람들이 성리학에 심취하며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교화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무사의 사고방식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무사"의 기본 가치관이 조선의 "선비"와 유사하게 변화한 것이라고 한다.
"효를 강조한 조선의 선비, 충을 강조한 일본의 사무라이"
또 하나, 둘의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조선의 선비는 "충"보다 "효"를 더 강조했음에 반해, 일본의 사무라이는 "효" 보다는 "충"을 더 강조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선비의 기원은... 고려시대 안향에 의해 성리학이 전래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실 이전부터 선비라는 존재는 있어왔겠지만, 본격적으로 선비라는 존재가 부각되던 시기는 아마, 고려시대, 안향이 중국으로부터 "성리학"을 들여오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성리학은 우주 만물의 근원을 이해하는 사상 중의 하나로, 일종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무사의 기원은..."
일본의 경우, 무사는 다양하게 생겨났다고 한다. 첫 번째는 바로 "농민"들이 자신들의 재산과 토지를 지키기 위해서 무장하면서 생긴 경우라고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헤이안 시대 후기(794~1191) 이러한 사무라이들이 많이 출현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도 농민 출신의 사무라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당시 일본의 도읍이었던 교토로 돌아가지 않고 임지에 남은 국사(지방관리)가 그대로 무사의 동량이 된 경우라고 한다. 국사로 임명되어 각 지방에 내려가 관리 생활을 한 사람을 수령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수령 중에는 교토에서 신분이 별로 높지 않은 중류 귀족이나 왕족도 있었다고 한다.
"이황과 성혼, 일본 학풍의 원류가 되다"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면,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의 선진 문물이 일본에 들여지게 되었는데, "성리학" 역시도 일본에 전파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바탕을 둔 성리학이 일본 성리학 학풍의 원류가 되었다는 것,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황의 저서가 일본의 약탈에 의해서 일본에 전달되고 일본 사람들이 그 책을 보고 감동을 받고 교화가 되는 계기가 되게 되었다니, 세상사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 통신사, 한류의 원조"
예전 국가 공부를 할 때, 조선 후기,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통신사는, 일본의 요청으로 간 적이 많았다고 배웠다. 단지, 조선의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하기 위해서, 일본과의 사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보냈다고 배웠는데, 이 책에서 조금 더 상세하게 나와있으니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조선에서 파견된 통신사는 마치, 지금의 한류스타와 같은 인기를 끌었다고 하니, 한류의 원조가 아니었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부분이기도 하다. 통신사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이 지은 "한시"를 보여주고, 교정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일본인이 있기도 하고, "한시"를 한 수 읊어 달라고 요청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고 하니... 당시 통신사의 인기가 어쩌면 지금의 한류보다 더 높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연 조선은 약한 나라에 불과했을까?
사실, 예전에 단편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공부할 때, 우리나라 역사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적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래도, 항상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은 잘 보이지 않고, 항상 수동적이고 당하는 입장이 그려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역시도 그렇다.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큰 전란을 겪으면서,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조금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인지, 조선 역사를 들춰볼 떄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 같다.
"성리학"에 대한 생각 역시도 서서히 바뀌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 역사를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성리학을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철학적인 것에만 선비들이 주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조선과 같은 나라에서 "성리학"이라는 철학이 꽃필 수 있었다는 것은 서양 철학과 비교해서도 크게 뒤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 때문이다.
비록, 두 차례의 전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금까지 잘 유지해올 수 있었다는 것 역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비록 우리나라는 항상 위에서 관리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들이 살려놓는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지만, 아마 이러한 것들이 유학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 궁궐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궁궐과는 다르게, 조선의 궁궐은 담이 상당히 낮다. 그만큼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넫, 백성들과의 거리를 두지 않았다는 것, 그만큼 왕도정치가 잘 이루어졌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책에서는, 조선 역사 못지 앟게 일본 역사도 상당히 많이 다루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일본 역사를 한번도 공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상당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부분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조선 역사와 함께 일본 역사를 조금이나마 접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어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오다 노부나가"와 같은 인물의 이름은 일본 역사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많이 들어본 이름이니, 한번 접해놓으면, 나중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 더 이해하기 편해지지 않을까 싶다.
일본 역사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독특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책,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를 비교한 책, 읽는데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던 한 권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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